잡학다식

구스타프 클림트, 미술계의 희대의 반항아

슈필1 2023. 7. 2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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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미술계를 뒤집어버린  '희대의 반항아'였습니다. 에곤 실레가 19금 누드화를 그리며 반항아가 되도록 도운 것도 클림트라고 하네요.

 

구스타프 클림트

 

1862년 구스타프 클림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귀금속 세공사였던 아버지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천부적인 재능으로 14세에 오스트리아의 최고 명문 빈 미술공예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가난 때문에 자퇴하고 미술 교사가 되겠다는 클림트를 교장이 말리고 장학금을 줬다고 합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프란츠 마치와 함께 주문을 받아 예술작품을 만들어 주는 '예술가 컴퍼니'를 창업합니다.  이때에 신 부르크 극장 내부 벽화, 빈 미술사 박물관 내부 벽화등 국가에서 주도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고 완벽한 작품으로 황제로부터 거액의 상금과 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 >&nbsp; 1888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 아직 까지는 반항아가 아님

청년 사업가로 승승장구 중이었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개성이 빠져있음 

 

클림트의 나이 서른, 동업자이자 친동생인 에른스트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클림트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예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의 그림에 철학과 개성이 빠져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빈의 모든 예술가들이 어떤 물음이나 비판 없이 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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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빈의 미술을 쥐락펴락했던  ' 빈 미술가협회'는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도는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수십 년 전부터 화가가 자연에서 느낀 인상을 '자기 마음대로 그리는 ' 인상주의가 탄생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 토양 위에 '새로운 예술을 하자'는 아르누보  Art Nouveau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독일에서도 '젊은 예술을 하자'는 유겐트스틸 Jugendstill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1897년 서른다섯의 클림트는 빈 미술가 협회에서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미술 그룹을 만듭니다. 주류 미술세력에서 분리되겠다는 의지를 담아 '분리주의 그룹'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빈 주류 세력의 비난에도 분리주의 그룹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혁명적 생각을 전하기 위해 <베르 사크룸 (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배포하고 그들만을 위한 분리주의 전시관 '제체시온'을 세웁니다. 

 

체제시온

제체시온 외관의 정면에는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는 메시지를 새깁니다. 

 

< 팔라스 아테나 > 1898

<팔라스 아테나 >  분리된 새로운 예술을 위해 싸우자!

고전주의 화풍의 절대 법칙인 원근법이 없으며,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 누다 베리타스 > 1899

 

<누다 베리타스 > 

아름답지 않은 누드가 노골적이기까지, 현실의 누드 

 

명문 빈 대학교가 클립트에게 대강당을 채울 천장화를 의뢰합니다. 대학에서 주문한 주제는 철학, 의학, 법학 세 가지였습니다.  클림트는 빈 대학의 기대와 달리 자신의 관점에서 인간이 만든 학문의 진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 철학 > 1899 ~ 1907

< 철학 >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철학의 진실 

인간이 아무리 철학을 한다 한들, 결국 고통과 번민 속에 있을 뿐이다. 

 

< 의학> 1900 ~ 1907

< 의학 > 인간이 아무리 의학을 한다 한들, 결코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진실 

건강과 위생의 여신 히게이아가 저승사자가 된 그림 

 

< 법학 > 1903 ~ 1907

 

 < 법학 > 나에게 허영을 바라지 마라 

심판받는 노인을 외면하고 딴짓하고 있는 세 여인

 

결국 철학, 의학, 법학. 세 연작은 비판 속에 철수 되고, 더 이상의 국가기관의 작품 의뢰는 들어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작품들이 모두 흑백인 이유는 제 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소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클림트는 시대의 반항아로 온갖 반발과 저항을 이겨내고 새로운 예술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의 분리주의 정신은 곧 에곤실레, 오스카 코코슈카라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들을 탄생시키는 인큐베이터가 되었습니다. 

 

조원재 지음의 < 방구석 미술관>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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