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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다식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미술계의 막장 드라마

by 슈필1 202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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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 사고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 번째 사고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다. "

 

프리다 칼로 < 벨벳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 , 1926

 

'고통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프리다 칼로, 그녀의 고통은 오른발 소아마비로 시작됩니다. 여섯 살에 성장이 멈춘 오른발은 평생 프리다를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프리다는 1922년 멕시코 최고 명문 학교인 국립대학 예비학교에 의사의 꿈을 가지고 입학합니다. 

 

프리다 칼로 < 사고 >, 1926

그러나 18살, 프리다를 태운 버스가 경전철과 충돌하는 사고가 나고 이 사고로 그녀는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심지어 골반뼈가 세동강 나며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나락으로 떨어진 절망의 순간, 프리다는 그림을 시작합니다. 

 

그 당시 디에고 리베라는 40세를 넘긴 멕시코의 국민 화가 였습니다. 1910년, 썩어빠진 기득권세력의 방종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며 분노에 찬 멕시코 민중들이 들고일어납니다. 이 멕시코 혁명 이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이 가득하던 때,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역사와 빛나는 미래를 벽화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당시 혁명 정부의 요구 사항을 잘 반영한 벽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1929년 8월 21일, 21세 프리다 칼로와 43세의 디에고 리베라가 결혼식을 올립니다. 디에고는 이미 두 번의 결혼 전력과 4명의 아이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세 번째 부인입니다.  둘은  프리다가 자신의 작품을 평가받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디에고를 찾아간 것에서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엮어준 결정적인 한방이 있습니다. 바로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인연입니다. 둘은 모두 멕시코 공산당원이었습니다. 정치적, 예술적 공감대로 사랑을 싹 틔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 < 무기고 > , 1928

 

디에고와 결혼후 프리다는 자신의 많은 것을 바꿉니다. 우선 멕시코 테우 아나 족 의상을 입기 시작합니다. 이 옷은 디에고가 매우 사랑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통사고 이후 삶의 이유 이기도 했던 작품 활동을 중지합니다. 국민화가인 디에고를 최대한 돕기 위한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에고는 결혼 생활에 무심했고, 아이를 가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프리다는 강한 모성 본능으로 아이를 가져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두 번의 유산을 겪게 됩니다.  고통에 빠져 병상에 누워있던 프리다에게 디에고가 종이와 연필을 선물하고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프리다가 두번째 유산으로 힘들어할 때, 디에고가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디에고는 첫 번째 결혼생활 때 부인의 친구와 불륜을 저질러 딸을 낳기까지 한 전력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국가 대표급 불륜남입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한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프리다는 이런 나의 역겨운 성격으로 인한 희생양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여인일 뿐이었다."  

 

프리다는 한장의 그림을 그려 디에고에게 보냅니다. 

<단지 몇번 찔렸을 뿐 > 

 

프리다 칼로 < 단지 몇번 찔렸을 뿐 > , 1935

 

디에고의 막장급 불륜에 대한 화답으로 프리다도 불륜 퍼레이드를 시작합니다.  그녀는 일본 조각가인 이사무 노구치와 사귑니다. 이 사실을 안 디에고가 총을 들고 이사무를 협박하고 결국 프리다와 이사무는 헤어집니다. 하지만 프리다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상대는 디에고가 멕시코 망명을 도울 정도로 존경하던 러시아 혁명의 전설, '레온 트로츠키'였습니다. 둘의 관계가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레온이 공적인 일에 개인감정을 개입해 디에고를 차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복수를 하면서도 디에고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음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프리다의 다음 상대는 사진작가인 니콜라스 머레이 입니다. 그는 당시 뉴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진작가였습니다. 그가 찍어준 누드사진 속 프리다의  평온한 표정을 보면 둘의 사랑이 진솔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1939년 말, 니콜라스는 프리다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납니다. 

 

니콜라스 머레이와 프리다 칼로

 

'뉴욕에는 일시적인 대용물이 있었을 뿐이오. 당신이 돌아간 자리에서 변함없는 안식처를 찾기 바라오. 우리 셋 중에서 항상 당신들 둘만이 함께였고, 난 항상 그걸  느낀다오. 당신이 리베라의 목소리를 들을 때 흘린 눈물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소. 나는 당신의 반쪽이 그처럼 친절하게도 나에게 베풀어준 행복에 영원토록 감사할 것이오.' 

 

1938년 멕시코 시티에서 프리다의 첫번째 전시회가 열립니다. 개인전이 아닌 그룹전이었지만 이 전시를 통해 프라다의 삶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그림을 시작한 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인 프리다는 이 전시에서 뉴욕 개인전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타임>지에 소개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후 프리다는 디에고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프리다는 멕시코시티에서 전시를 한지 단 1년만에 미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전시를 합니다. 이 전시에서 피카소, 칸딘스키, 호안 미로등 대가들의 관심을 받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프리다의 자화상을 구입하기에 이르고 그녀는 루브르가 선택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화가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불후의 명작 <두 명의 프라다>를 그립니다. 

 

프리다 칼로 < 두 명의 프리다 >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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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가 사랑하는 국민 부부,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멕시코 500페소 지폐

 

멕시코 500페소 지페에는 앞면에는 디에고 리베라, 뒷면에는 프리다 칼로가 그려져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이 부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국보급 화가임과 동시에 1910년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도록 생을 바친 정치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프리다 칼로는 16세기 스페인의 무력 침략과 식민지화로 맥이 끊겼던 멕시코의 전통을 예술로 계승했습니다. <유모와 나> , <뿌리 혹은 거친땅 > 등의 작품에 프리다의 애국심이 담겨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인디오가 남긴 문화적 뿌리와 멕시코인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웅장한 벽화로 담아냈습니다. 또한 그는 평생 수집한 6만여점의 멕시코 고대유물을 기증해 아나우아카이 박물관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 상기내용은 조원재 지음 '방구석 미술관' 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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